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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 교류전기 발명


Nikola Tesla


나는 우주선(線)을 이용하였고 그것은 장치를 작동하는 근거가 되었다.



1856년 7월 10일 ~ 1943년 1월 7일

미국 뉴욕

직업 :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 공학자, 전기 기술자

 

니콜라 테슬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르비아-아메리칸 발명가이자, 물리학자, 기계공학자, 전기공학자이다. 테슬라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명가 중 하나로 여겨지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전기학과 자기학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테슬라의 특허들과 이론들은 다상력 분배 시스템과 AC 모터를 포함하는 현행의 전기력 (AC)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제2의 산업혁명을 예고하였다.


역사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미국에서 테슬라의 명성은 그 어떤 발명가나 과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1893년 무선통신의 실연이나 “전류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그는 미국의 위대한 전기공학자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의 초기 작업의 대부분과 그가 발견한 기공의 중요성은 현대 전기 공학의 선구가 되었다. 1943년 미연방 대법원은 그를 무선통신의 발명가로 인정하였다. 자신의 재정적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테슬라는 86세의 나이에 가난하게 죽었고 잊혀졌다.


태슬라의 유산은 전기가 사용되고 있는 현대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전자기학과 공학에 대한 그의 업적을 제쳐 놓더라도 로봇공학, 탄도학, 컴퓨터 공학, 핵 물리학과 이론 물리학 분야를 다양화하는데 기여한 공로도 크다. 또한 테슬라는 미친 과학자로도 여겨졌는데 가능한 과학적 발명품들에 대한 기괴한 주장으로 유명했다. 그의 많은 업적들은 논쟁과 함께 UFO 이론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신비주의라는 다양한 사이비 과학을 후원하였다. 테슬라의 동시대 지지자들은 “20세기를 발명한 남자”라고 그를 떠받쳤다.


목차

1 초년기

1.1 헝가리와 프랑스

1.2 미국

2 중년기

2.1 콜로라도스프링스

3 말년기

3.1 장(場) 이론

3.2 대(對)핵미사일용 빔 무기

3.3 이론의 고안

4 죽음과 그 후

5 교우관계

6 개인적 견해들


1. 초년기

기록에 의하면 테슬라는 폭풍우 치는 밤에 현재 크로아티아 지역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리카 지역의 세르비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6년 6월 28일 날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가정에서 쓰이는 도구들을 만드는데 소질이 있었다. 테슬라는 다섯 자녀들 중 하나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공업학교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교류전기의 사용에 대해 공부하였다. 그는 한 학기만 수학하였고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그 후 프라하 대학의 분과에서 여름학기를 다니며 물리학과 고등수학을 배웠다.

 

테슬라는 많은 것들을 읽었고 책들을 완벽하게 기억하였고 또한 사진같이 정밀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영감의 순간 세세한것까지 경험하였다고 적고 있다. 테슬라는 초년기에 병약하였다. 그는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의 기괴한 고통을 경험하였는데 이는 환각을 수반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이템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현실적인 디테일로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슬라는 구성단계 이전에 그의 머리에서 정확하게 발명을 그려낼 수 있었다. 테슬라는 종종 그가 이전에 겪었던 사건들이 환각적으로 재현되곤 했었는데 이것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였다.

어린시절 니콜라 테슬라


1-1. 헝가리와 프랑스

1881년 그는 미국 전화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옮긴다. 그는 거기서 젊은 오스트리아 발명가인 네브라스타 페트로익을 만나는데 그들의 만남은 짧았지만 둘은, 지속적인 힘을 만들어 내기 위해 트윈 터빈을 사용하는 프로젝트에서 일하였다. 1881년 부다페스트에서 전화 교환이 개시하자 테슬라는 회사의 전기담당관이 되었고 나중에 국가의 첫 번째 전화 시스템 기사가 된다. 그는 또한 일련의 발명들을 하는데 전화 자동 중계 장치와 증폭기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최초의 확성기였다고 한다. 그가 슬로베니아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첫 엔지니어 조수가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신경쇠약을 경험했다. 1882년 그는 파리로 옮겨갔고 대륙 에디슨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는데 전기 장비를 위해 향상된 디자인을 하게 된다. 같은 해 테슬라는 유도 모터를 착상하게 되고 회전하는 자기장을 사용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발명하기 시작한다(이는 1888년에 특허로 인정된다.)


그 후, 테슬라는 파리에서 죽어가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 1882년 그녀가 죽기전에 도착한 그에게 어머니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 니콜라 도착했구나..나의 자랑스런 아들아.” 그녀의 죽음 이후, 테슬라는 병에 걸렸다. 그는 요양을 위해 2~3주간을 그의 어머니가 태어났던 크로아티아 마을에 머무른다.


1-2. 미국

1884년 테슬라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이전 지배인이였던 찰스 베첼러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다. 토마스 에디슨에게 쓴 추천장에서 찰스 베첼러는 “나는 위대한 두 사람을 알고 있다. 한 사람은 당신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 젊은 청년이다.”라고 썼다. 에디슨은 그의 에디슨 기계 회사에 테슬라를 고용했다. 테슬라는 간다한 전기공학적 일을 시작하였고 차츰 회사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빠르게 진행하게 되었다. 테슬라는 에디슨 화사의 직류 전기 발전기의 재개발 임무를 부여받았다.


1919년 에디슨은 테슬라가 모터와 발전기의 개량문제를 해결한다면 5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테슬라는 자신이 그것들을 재개발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에디슨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 새로운 특허를 획득하게 하기 위해 거의 일년의 시간을 매달렸다고 말한다. 테슬라가 에디슨에게 5만 달러를 요구했을 때 에디슨은 “테슬라, 너는 미국식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약속을 어겼다고 전해진다. 테슬라는 자신의 주당 25달러 인상이 거절되었을 때 그곳을 그만두었다. 테슬라의 주당 임금은 18달러였고 보너스를 합쳐도 연간 53달러를 넘는 금액이였다. 그것은 회사의 최초 자본금과 맞먹는 금액이였다. 그는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에디슨 회사에서 짧은 시간 한 우물을 판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에디슨 역시 직류 전류의 미래를 확신하며 테슬라의 다상 교류 구상에 대해 듣기를 거부하였다. 테슬라는 자신의 다상 교류 시스템에 집중하게 되었다.


2. 중년

1886년 테슬라는 ‘테슬라 전등 & 제조’라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였다. 초기 자본 투자가는 테슬라의 교류전기 모터에 대한 계획에 반대하였고 결국 회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테슬라는 1886년부터 1887년까지 뉴욕에서 밥벌이와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평범한 노동자로 일한다. 1887년 그는 최초로 방전되지 않는 교류전기 유도 모터를 구성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1888년에 미국 전기 기술자 학회에 소개한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테슬라 코일 원리를 개발하고 ‘웨스팅하우스 엘렉트릭 & 제조 공장’의 피츠버그 연구실에서 조지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웨스팅하우스는 먼 거리까지도 전송 가능한 교류 전기의 다상 시스템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듣게 된다. 

 

자신의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테슬라


1887년 4월, 테슬라는 단파장 진공 튜브를 이용한, 후에 엑스레이라도 불리게 되는 것을 발명하게 된다. 이 장치는 대상 전극이 없었던 이전의 엑스레이 튜브들과는 달랐다. 현재 우리는 이 장치가 자기장 방출과 열전자 방출의 조합을 통한 단파장 전자방출로 인해 작동한다는 것을 안다. 한 번 자유로워진 전자는 테슬라 코일의 진동 HV 출력으로부터 음극의 전압이 최고조에 이르는 동안 높은 전자기장에 의해 심하게 반발하게 된다. 이 때 외피와 충돌하면서 엑스레이를 방생시킨다. 그 역시 가이슬러관 튜브를 이용하였다. 1892년부터 테슬라는 후에 엑스레이의 효과를 밝힌 빌헬름 뢴트겐의 의도를 깨닫게 된다.  


테슬라는 단파장 엑스레이를 산출하는 장치에서의 작업 위험성에 대해 설명했다. “피부에 해로운 작용이 더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출력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것은 뢴트겐선이 아니라 단지 피부에 접촉한 오존이였다. 어쩌면 질산이 원인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은 범위였을 것이다.” 후에 테슬라는 그의 연구실에서 엑스레이에 의한 연소에서 조수를 엄격하게 관찰하곤 했다. 그는 뢰트겐의 발견 이전에 이미 여러 실험들을 시행했었다.(그의 손뼈에 대한 사진을 포함하여, 나중에 그는 이 사진들을 뢰트겐에게 보냈다.)그러나 그의 그러한 발견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많은 연구들은 1895년 3월 5번가에 있던 연구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니콜라 테슬라의 발전기 시스템은 먼 거리에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한 교류 회로에 쓰인다.


1891년 7월 30일, 그는 35세의 나이로 미국의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 뉴욕 남쪽 5번가 거리에 자신의 연구실을 설립하였다. 테슬라는 뉴욕에 그의 ‘휴스턴 철강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선 전력 전도 가능성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뉴욕 지역에서 무선의 진공 튜브를 밝혔다. 테슬라의 가까운 친구 중 일부는 예술가였는데 그는 센츄리 매거진의 편집장 로버트 언더우드 존슨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테슬라는 스와니 비베카난다의 베단타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테슬라가 36세 때 그의 다상력 시스템에 관하여 처음으로 특허가 주어진다. 그는 시스템과 회전하는 자기장 이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테슬라는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전자 기술자 미국 협의회의 부사장으로 일했다. 1893년부터 1895년까 그는 고주파 교류 전류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원뿔 테슬라 코일을 이용해 백만 볼토의 교류를 생산해냈고 그 결과물이 피부에 미치는 영향를 연구했다. 음질 회로를 이용해 수면을 유도하는 기계를 만들고,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램프와 첫 번째 라디오 설계에 효과적인 무선 송신 전자력도 선보였다. 1893년 테슬라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라디오 통신과 관련된 시범을 보이며 필라델피아와 펜실베니아에 있는 플랭클린 학회와 국가 전등 협회에 접속하였다. 그는 그것의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시연하였으며 테슬라의 시연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널리 발표되었다.


1893년 시카고의 월드 콜롬비아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전기에 관한 것들이 진열되었다. 이것은 테슬라와 조지 웨스팅하우스에게는 역사적인 사건이였다. 그들은 박람회를 밝히는데 교류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테슬라의 형광등과 단파장 전구도 전시되었다. 테슬라는 “콜럼버스의 달걀"로 알려진 장치의 설명 마지막에 구리로 달걀 만드는 법을 시연함으로 회전 자기장과 유도 모터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한 1880년대 말경에 더 효율적인 교류전류를 만들어낸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를 뛰어넘어 전기력의 분산을 위한 에디슨의 직류 회사 창립 때문에 그 분야에서 테슬라와 에디슨은 경쟁자가 되었다. 테슬라가 유동 전동기를 발명하기 전까지 교류전류는 원거리 고전압 송달에는 효과적이였지만 모터를 작동시킬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류의 전쟁”에 대한 결과는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를 거의 파산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1897년 테슬라는 테슬라의 특허 사용료 제공을 중단함으로써 웨스팅하우스를 포기하게 된다. 1897년에 테슬라는 우주선(線)의 기초공식을 세움으로써 복사 에너지를 연구한다.


테슬라는 41세에 최초의 기본적인 무선통신 특허를 신청한다. 일년 뒤, 그는 무선통신으로 컨트롤 되는 어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미군에게 무선통신으로 컨트롤 되는 보트를 시연하게 된다. 그리고 로봇식의 “원거리자동조작기계의 예술”을 개발한다. 1898년 무선으로 컨트롤되는 보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전기 전람회에서 일반에게 공개 시연되었다. 이런 장치들은 혁신적인 코히러와 일련의 논리 게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원거리 무선 제어는 1960년대까지 최신발명품으로 남았다. 같은 해, 테슬라는 “전기 점화기” 혹은 가솔린 내연기관을 위한 스파크 플러그를 발명한다. 그는 이 기계적 점화 시스템으로 “가스엔진을 위한 전기 점화기” 미국 특허 609250을 획득한다. 테슬라는 Gerlach 호텔 맞은편에 살았는데, 그가 20세기 말 전파장치를 생산하자 전파 빌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1977년 그 빌딩에 기념명판이 세워졌다.  

 

2-1. 콜로라도 스프링스

수백만 볼트의 전기를 발생시키는 “증폭 전도체”와 함께 콜로라도스프링스의 자신의 실험실에 앉아 있는 사진

아크는 7미터 길이이다.


189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옮겨 연구하기로 결정한다. 그곳에는 그는 고압전류, 고주파 실험을 위한 방을 가지게 된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파리의 파이크 피크에서 무선 통신 신호기를 만들었다고 발표한다. 테슬라의 일기에는 이온층, 횡단파와 종단파를 매개로 하는 지전류 실험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그의 연구실에서 테슬라는 지구가 전도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공 번개를 만들었다. 테슬라는 또한 대기중의 전류를 연구하고 그가 받은 번개 신호를 관찰하였다. 테슬라가 받은것과 코히러 회로의 재현은 복잡성에 대한 예측 불가능한 레벨을 보여주었다.


테슬라는 이 기간동안 변하지 않는 파동에 대해 정기적으로 관찰하였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실험실에서 우주의 전파 신호라고 그가 맏었던 신호를 기록하였다. 물론 이런 기록과 그의 데이터는 과학 학회에서 거부되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태풍과 지구 잡음으로부터 그가 기록한 신호와는 전혀 다른 반복성 신호의 측정을 기록하였다. 특히 그는 나중에 이것들이 하나의 그룹에서 두 개, 세 개, 네 개의 제동자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테슬라는 그의 말년을 화성의 신호를 분석하는데 보낸다. 1996년 코룸(Corum)이 목성의 플라즈마 토러스(원환면) 신호의 분석을 발표했다. 이 신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화성의 일몰과 테슬라가 그곳에 있던 1899년 여름, 목성으로부터의 신호가 중단된 것 사이의 일치를 암시한다.


테슬라는 1900년 1월에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떠난다. 연구소는 해체되었고 연구성과물들은 빚을 갚기 위해 팔았다. 콜로라도 실험은 테슬라에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였다. 테슬라는 무선 동력 통신 설비를 설립하고 이는 워든클리프로 알려진다. 테슬라는 전기 진동의 증가를 측정함으로써 미국 특허 685012를 받는다. 미국 특허청 사무실 분류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이 특허를 비록 다른 적용 가능한 등급인 505/825(저온 초전도성-관계 장치)가 있었지만, 현재 통용되고 있는 최초의 178/43 등급으로 지명한다.(전신(통신)/공간 유도)


3. 말년

 

테슬라의 워든클리프 타워는 뉴욕의 쇼햄에 있다.


1900년에 테슬라는 15만 달러를 가지고 원든클리프 타워 계획을 시작한다. 테슬라의 연구실 게획은 휴스턴 거리에서 원든클리프로 옮겨졌다. 타워는 결국 전쟁중 파괴되었다. 타임지는 “테슬라의 백만달러짜리 실수”란 이름표를 붙였다. 1904년 미국 특허 사무소는 자신들의 결정을 취소하고 마르코니에게 무선전신 통화에 대한 특허를 주었다. 그리고 테슬라는 무선전신 통화에 대한 특허를 다시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1906년 그의 50번째 생일날 테슬라는 그의 200 고압(150 kW) 분당 회전 16,000의 노블레이드 터빈을 발명하였다. 1920~1911년 동안 뉴욕에 있는 수력 발전소에서 그의 노블레이드 터빈 엔진 여러대가 100~5000 고압에서 테스트 되었다.


1909년 무선통신으로 마르코니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1915년 토마스 에디슨과 테슬라는 노벨상의 공동수상 후보자로 언급되었다. 어떤 소식통들은 서로에 대한 원한 때문에 그들의 대단한 과학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받지 못할 것이라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의 업적을 경시하는 태도로 만약 다른이가 먼저 상을 받을 경우 둘 다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 하였다. 루머에 따른 사건 이후로, 에디슨과 테슬라 누구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일찍이, 1912년 테슬라는 홀로 노벨상에 홀로 후보자가 되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노벨상에 대한 루머는 원래 그가 고압전류 고주파 공명 변압기를 사용한 회로를 내놓았을 때 나온 것이었다.


1925년, 테슬라는 마르코니의 주장에 대항해 법원의 명령을 받으려는 소송을 걸었으나 실패한다. 1916년 즈음, 테슬라는 체납세금으로 인해 파산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테슬라는 워든클리프 이후, 롱아일랜드에 “텔레푼켄 무선국”을 지었는데 워든클리프에서 그가 달성하려고 했던 어떤 임무를 성취하게 되었다. 1917년, 독일 스파이가 사용할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에 설비들은 마리나에 의해 소유되고 해체된다. 


세계 제1차 대전 이전, 테슬라는 그의 연구에 투자할 외국의 투자자를 찾았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유럽 특허로부터 받던 펀드를 잃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테슬라는 세계 1차 대전 후 환경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해 예측을 했다. 그는 국제연맹이 시간과 문제점들 구제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테슬라는 이후 강박 신경증의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빌딩에 들어가기 전에 블록 주위를 세 번 돌고, 식사때마다 접시 옆에 세 번 접힌 냅킨을 요구하는 등 숫자 3의 망상에 사로잡힌다. 민간방위국은 이러한 시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증상은 편집광의 어떠한 증거로 여겨졌고 이러한 병은 그의 명성에서 기인한 것이였다.


이 시기에, 그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머물렀고 연금으로 생활하였다. 결국 워든클리프의 권리는 조지 볼트에게 넘어갔고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소유자는 20만 달러의 빚을 지불했다. 1917년, 워든클리프 타워는 볼트에 의해 헐어졌고 테슬라는 미국전기학회의 최고 명예인 에디슨 메달을 받게 되었다.


1917년 8월 테슬라는 원시 레이더 구성을 위한 빈도와 파워 레벨에 관한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다. 1934년, 프랑스의 레이저 시스템에서 일하던 기요맹은 “테슬라가 정리한 원리에 따라 고안하였다.”라며 레이더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20년 동안 테슬라가 방사선 시스템에 대해 영국 정부와 협상을 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테슬라 또한 “죽음의 방사선”이라 불리는 것을 도용하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 진술하였다. 체임벌린 정부의 철수는 이러한 협상의 종료를 암시하게 하였다.

자신의 나선형 코일 고주파 변압기 앞에 앉아 보슈코비치의 저서 ‘자연철학의 원리’를 읽고 있는 니콜라 테슬라


1931년 테슬라의 65번째 생일날, 타임지는 그를 커버에 넣는다. 커버의 설명문은 전기력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테슬라는 1928년 그의 수직이착륙 항공기에 대한 첫 사례로 항공 운송에 대한 마지막 특허를 획득한다. 1934년, 테슬라는 Janković 영사에게 자신의 조국에 대한 글을 쓴다. 편지에는 미국회사가 테슬라를 후원할 수 있게 기부재단을 창시한 푸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테슬라는 원조를 거부하였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받는 간소한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3-1. 장(場) 이론

그가 81세 때, 테슬라는 중력(무게)에 대한 동력이론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것을 “모든 세부적인 것들의 산출”이라 여겼고 빨리 세상에 발표하기를 원했지만 그 이론은 결국 발표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발표시기에 과학재단이 그의 통일된 장 이론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론의 대부분은 1892년과 1894년 사이에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고주파-고변압의 전자기와 그것들을 활용한 특허 장치를 이용한 실험장치를 만들어냈다. 테슬라에 의하면 그것은 1930년 말 완벽하게 되었다고 한다. 테슬라의 이론은 횡파장과 경도파장의 전기역학적 공존을 이용하여 중력을 설명하였다. 마하의 이론을 연상시키는 테슬라의 이론은 1925년 발표되었다.


테슬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판하였다.

...장대한 수학적 외관은 매혹적이고 눈이 부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초적인 실수로부터 눈이 멀게 한다. 이론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거지와 같아서 무지한 사람들이 왕으로 여기게 된다..., 그것의 대표적 인물들은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들은 과학자라기보다 메타물리학자이다.


3-2. 대(對)핵미사일용 빔 무기

인생 말년에, 테슬라는 “무선력” 무기에 관련된 주목할만한 주장을 하게된다. 언론은 그것을 “평화광선”이나 죽음의 광선이라고 불렀다. 전체적으로 성분과 방법을 포함하여:

과거처럼 진공이 아닌 공기에서 에너지를 산출하는 장치, 테슬라에 의하면 이것은 1934년 완성되었다.

엄청난 전기 에너지를 산출하는 기계, 역시 테슬라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도 완성되었다.

에너지를 증가시키고 증폭시키는 장치 역시 두 번째 기계에 의해 실현된다.

테슬라는 1900년대 초부터 자신이 죽을때까지 빔 무기와 관련된 일을 하였다. 1937년, 테슬라는 “자연적 매체를 통한 분산하지 않는 에너지에 집중된 프로젝팅의 예술”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정전기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적에 의하면 그것은 액체 수은이나 고전압을 통해 가속된 텅스텐의 원자 다발의 한정된 흐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테슬라는 소립자 총의 작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노즐은 아마]“공기를 통해 응집된 소립자 빔을 보낼 것이다. 그런 굉장한 에너지는 적의 10000대의 비행기를 200마일 거리에서 격퇴시킬 것이다.” 무기는 보병대를 중심으로 한 지상전을 대비하고 방공을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3-3. 이론의 고안

테슬라는 전기학, 공간과 시간을 바꿀 수 있는 자기력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론화를 시작하였다. 테슬라는 생애 말기에 무엇이 양자물리학이 될것인가에 대해 기초적인 제안과 함께 빛의 소립자와 파동에 매혹된다. 이러한 연구의 장은 다룰수 있는 특정한 패턴의 전자석 파동인 “빛의 벽”을 창조하는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게 된다. 이 미스테리한 빛의 벽은 시간, 공간, 중력과 물질을 마음대로 바뀌는 하는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테슬라가 제안한 반중력 비행선, 순간이동, 시간여행 등은 과학소설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가장 생소한 발명품은 “염사(관념이나 생각을 사진으로 찍는 일)” 기계였다. 그는 생각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모양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이미지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신경 전달의 전기적 데이터가 기계에 의해 읽히고 기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장된 정보는 인공의 시신경을 통해 처리되고 스크린을 통해 시각적 모양으로 재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테슬라의 다른 이론의 고안은 일반적으로 그의 비행물체 같은것에 볼 수 있다. 테슬라는 그의 인생 목표 중 하나가 비행기 엔진, 날개, 보조익, 프로펠라, 내장된 연료가 없는 비행물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 테슬라는 지상의 정거장에 있는 있는 전지모터의 힘을 이용하여 날 수 있는 비행기에 대해 생각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비행기가 완전히 자동으로 비행하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였다. 이론은 시가와 접시의 모양에서 나왔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그를 UFO 음모 이론가로 부추겼다.


4. 죽음과 그 후

 

테슬라의 반신상


테슬라는 1943년 1월 5일 아침과 8일 아침 사이에 뉴욕 호텔에서 심기능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그의 교류전기 특허품이 판매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빈곤했고 빚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미 대법원에서 테슬라의 특허 번호 645,576를 사실상의 무선통신 발명으로 승인하였다. 


테슬라가 죽자 그의 미국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즉시 연방수사국에서 외국인 자산 관리국으로 하여금 그의 문서와 재산을 입수하도록 지시하였다. 호텔의 그의 금고 또한 공개되었다. 테슬라가 죽을때쯤, 그는 미국 육군성에 내놓지 못했던 원거리조종 무기나 죽음의 광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제안했던 죽음의 광선은 구전광과 플라즈마, 미립자빔 무기와 혼합된 그의 연구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국 정부는 금고에서 발명의 원형을 찾지 못했다. FBI가 육군성과 접촉한 뒤, 그의 문서는 극비문서로 공표되었다. “평화의 광선”이라고 불린 광선은 파괴를 의미하는 음모이론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었다. 개인적 결과물들은 대통령 고문에 의해 회수되었고, 테슬라의 발명품과 특허의 특성 때문에 존 에드가 후버에 는 이를 “기밀문서”로 분류하였다. 한 문서에는 “그는 80트럭 분량의 사본과 실험에 대한 계획을 각기 다른 장소에 보관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나이아가라 폭포 국립공원의 테슬라 동상


테슬라의 가족과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은 연구에 있어 잠재적인 중요성 때문에 테슬라의 물건들을 미국으로부터 획득하려고 애썼다. 결국, 그의 조카가 지금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개인적 물건들을 다소 입수하게 되었다. 테슬라의 장례식은 1943년 1월 12일 맨해튼에 있는 대성당에서 치러졌다. 장례식 이후 그의 시체는 화장됐고 재는 1957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보관되었다. 그의 묘지는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에 있고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테슬라는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번 Vilma Lwoff-Parlaghy 왕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렸었는데 그것은 지금 분실되었다. 그의 바램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Ivan Meštrović가 그의 조각을 만들어 주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볼 기회를 얻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Meštrović는 1952년 테슬라의 금동 반신상을 만들었고 그것은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조상은 테슬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150주년 기념일에 자그레브 도시 중심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 거리로 옮겨졌다. 1976년 테슬라의 청동상은 뉴욕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옮겨졌다. 비슷한 동상 역시 1986년 그의 고향에 세워졌다.


유네스코에 의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정부가 동시에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선언하였다. 테슬라 탄생 150주년 기념일(2006년 7월 10일)에서 스밀랸 마을은 개선된 테슬라의 집과 그의 일생과 업적을 기리는 새로운 멀티미디어 센터를 대중에 공개하였다. 박물관과 멀티미디어 센터는 테슬라 업적들의 복사본들로 채워졌다. 박물관은 테슬라가 발표하였거나 그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 자료들은 뉴욕의 ‘테슬라 기념 협회’의 Ljubo Vujovic가 제공한 것들이다. 테슬라의 집과 나란히 조각가 Mile Blazevic가 만든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Gospić 도시 근처에는 같은 날, 개선된 마을과 박물관, 테슬라의 이름을 딴 고등교육기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Frano Krsinic가 제작한 테슬라 조상의 모조상이 선을 보였다.


몇 년후,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졌던 다양한 이론들을 입증하는 그의 많은 기술과 이론,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테슬라의 고유한 작업의 대부분은 과학적인 원리와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성격과 그의 천재성과 관련된 비현실적인 주장들이 그의 과격한 이론가들과 “숨겨진 지식”을 믿는자들에게 유명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음모이론가들은 그가 인간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알리기 위해 금성에서 지구로 보내진 천사라고 믿었다.


5. 교우관계

 

1984년 니콜라 테슬라의 연구실에 있는 트웨인


그의 인생 중반에 마크 트웨인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그의 연구실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테슬라는 또한 로버트 언더우드 존슨과도 친구였다. 그는 프랜시스 메리언 클라포드, 스탠포드 화이트, 프리츠 르윈스테인, 조지 스체프, 케네스 스웨지 같은 사람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에디슨과의 사건 이후에는 신랄했다. 에디슨이 죽은 뒤에 뉴욕타임즈는 에디슨의 생애에 대한 광대한 지면을 할애했는데 거기에는 유일하게 부정적 의견을 가진 테슬라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취미도 없고, 어떤 종류의 오락거리도 없었다. 또한 그는 기본적인 위생규칙도 무시하고 살았다.”

“실험에 있어 그의 방법은 최고로 비효율적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실험과 지식에 대해 딱한 증인이 될뻔했다. 그러나 빈약한 이론과 계산이 그를 실험실에서 구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배우는 것과 수학적 지식, 실험에 있어 자신을 완전히 믿는 것, 실질적인 미국인의 센스를 경멸하였다.”

테슬라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독신이였고 자신의 금욕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의 과학적 능력에 많은 긍정적 작용을 하였다. 


6. 개인적 견해들

테슬라는 전쟁의 재발이 제거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하였다. 그는 우호적 국제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통신에 있어 더 이해가 쉽고, 전달이 잘되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테슬라는 일생동안 미혼이였고, 우생학의 선택교배설의 지지자였다. 1937년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 ‘동정심’이라는 인간의 새로운 감각은 자연의 무자비한 작용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문명과 인류를 위한 모순없는 유일한 방법은 불임과 교배본능을 신중한 안내로 부적당한 번식을 막는 것이다[...]. 우생학자들 사이에 지배적인 의견은 우리가 좀 더 신중하게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아이를 낳는 것이 허락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부모는 없다. 한세기 후에는 평범한 사람이 우생학적으로 부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926년 테슬라는 인터뷰에서 여성의 사회 공헌이 불충분한 것과 양성 평등을 위한 여성의 노력에 대에 언급하였다. 인류의 미래는 “여왕벌”애 의해 움직일 것이라 지적하면서 그는 미래에 여성이 지배적 성(性)이 될것이라 믿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denuit?Redirect=Log&logNo=90019131920 

원문 출처 : 위키피디아(번역의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음)

작년에 영화 '프레스티지'를 보고 궁금해진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번역